2001년 이후 23년째 유지돼 온 예금자 보호한도 5천만 원. 금융당국은 이를 1억 원으로 상향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겉보기엔 반가운 소식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혜택은 소수에게, 부담은 다수에게’ 돌아가는 구조라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 국제 비교에서 드러나는 ‘낮은 기준’
한국의 예금자 보호한도는 주요국에 비해 확실히 낮은 편이다. 미국은 약 3억 4천만 원(25만 달러), 독일은 1억 5천만 원(10만 유로), 일본조차 1억 원 수준(1천만 엔)이다. 5천만 원이라는 기준이 2001년 제정 이후 단 한 차례도 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향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비교는 함정이 있다. 예금자 보호의 본질은 모든 예금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소액 예금자’를 안심시키는 데 있다. 국제예금보호기구(IADI)조차 예금자 95% 수준 보호를 권고 기준으로 삼는다. 한국은 이미 98%의 예금자가 보호되고 있다. 이번 상향으로 이 수치는 99%로 올라가지만, 과연 1%포인트의 상승을 위해 전체 금융 생태계가 떠안아야 할 부담이 정당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예금자 보호제도는 왜 존재하는가?
이 제도는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산물이다. 당시 은행이 연쇄적으로 파산하면서 예금자들이 공황 상태로 예금을 인출했고, 그로 인해 멀쩡한 은행들까지 무너졌다. 이른바 ‘뱅크런’의 시작이었다.
은행이라는 조직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단기 예금으로 장기 대출을 운영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특히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뱅킹이 일상화된 지금, 한 번의 터치로 순식간에 뱅크런이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예금자 보호제도는 단지 보호가 아니라, 심리적 신뢰를 구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 고작 1%를 위해 대다수가 비용을 치르게 될까?
금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전체 예금액 중 보호한도를 초과한 비중은 약 52%에 이른다. 얼핏 보면 절반 이상의 예금이 보호받지 못하는 셈이지만, 이는 ‘예금액’ 기준이다. ‘예금자 수’ 기준으로는 5천만 원 이하 예금자가 무려 98%에 달한다. 예금자 보호한도가 1억 원으로 늘어나도 99%가 보호받는 수준일 뿐이다.
다시 말해, 1%의 예금자를 위해 전체 금융 시스템의 비용 구조가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보호한도가 올라가면 예금보험공사의 책임도 늘어난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보험료율 인상은 불가피하다. 예보는 이를 3년 유예하겠다고 했지만, 2028년 이후 적용될 새로운 보험료율은 평균 27% 인상이 예상된다. 이는 결국 금융회사의 원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예금금리 인하 및 대출금리 인상이라는 형태로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 정책당국의 숨은 의도
이번 조치에는 또 하나의 정책적 계산이 숨어 있다. 바로 저축은행의 유동성 지원 효과다. 최근 부동산 PF 부실 문제 등으로 저축은행의 연체율이 급등하면서 대규모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 보호한도가 늘어나면 고금리를 제공하는 저축은행으로 자금 유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예금보험공사의 분석에 따르면, 예금자 보호한도가 1억 원으로 올라가면 저축은행 예금이 25%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이번 조치는 예금자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운 저축은행 구제 성격의 유동성 정책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 예외지대, 새마을금고
한편, 예금보험공사의 보호 대상이 아닌 새마을금고는 이번 상향안에서 소외된다. 새마을금고는 행안부 산하로, 자체 예금자 보호기금으로 운용된다. 하지만 지난해 적자 규모만 1조 7천억 원에 달하고, 2023년 이후 부실금고 24곳이 통합되는 등 상황이 녹록치 않다. 중앙회가 감당하지 못할 경우 결국 정부 지원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
예금자 보호제도의 사각지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향후 제도 통합 논의도 필요하다.
■ 마무리: '선의'가 반드시 '공정함'은 아니다
예금자 보호한도를 1억 원으로 올리는 정책은 겉으로 보기엔 예금자 보호 강화라는 선의로 포장돼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고액 예금자와 일부 금융기관에 혜택이 집중되고, 다수 서민 예금자는 비용만 떠안게 되는 구조다.
더 많은 예금자를 보호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보호받고, 누가 비용을 지불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빠진 정책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 1%의 보호 강화를 위해 98%가 뒷짐을 져야 하는 구조라면, 지금이야말로 ‘선의’의 탈을 쓴 정책의 실질적 이해관계를 따져볼 때다.